어느 채식주의자와 그 가족. 2011/02/17 22:47 by 카피올라니


남편이 채식을 선언한지 넉달이 되어간다. 처음엔 그러다 말겠거니 했다. 평소에 워낙 고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한 달이 지나면서 슬며시 물어봤다. 그런 결심을 하게 된 동기가 무엇이냐고. 나 혼자 추측컨대 직장 건강검진을 해보니 살을 빼라거나 내장비만이라는  말을 들어서... 뭐 이런 얘기가 나올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지난 가을에 베트남 출장을 갔다가 차를 타고 시골을 지나게 되었는데 들판에 삐썩 마른 소들이 지나가는 차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란다. 그 중 한 소랑 눈이 딱 마주쳤는데 갑자기 '아... 고기를 먹으면 안되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청천병력 같은 계시라고나 할까.

안그래도 황태자 입맛인 사람이 육식을 끊으니 그 입맛은 더욱 예민해졌다. 입맛만이 아니라 후각도. 국에 들어간 멸치때문에 된장국도 비려서 못먹겠고, 시중에서 파는 인스턴트 칼국수도 스프베이스는 육수가 되니 그것도 안되고, 김치도 젓갈이 많이 들어간 것은 못먹겠단다.비건까지는 아니지만 락토 정도 되는 수준의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치즈와 버터만 허락되는 정도.

갑자기 식탁에 대혼란이 왔다. 날마다 밥과 김치만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직장에서의 회식이나 대인관계 문제는 내 영역이 아니니 알아서 하라고 하고, 당장 집에서 먹는 아침식사와 두 세 번의 저녁식사. 그리고 주말 식사가 문제였다. 더구나 아이들이 한창 성장기에 있기 때문에 식단을 통일시킬 수도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내가 육식을 별로 즐기지 않고, 평야지대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어느 정도 다양한 야채요리를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외식도 선택의 폭이 확 줄어들었다. 그렇게 좋아하던 냉면도 못먹으니....그렇게 그럭저럭 넉 달이 지나갔고 덩달아 나도 체중이 줄었다.   

일품으로 고기나 생선 요리를 했던 것 빼고, 생각해보니 여기저기 다양하게 조금씩 고기가 들어갔던 게 많았는데 버섯이나 다시마, 야채들로 많은 부분 커버할 수 있었다. 매 끼 마다 아이들 메뉴 따로 남편 메뉴 따로 할 수 없어서 초기와는 다르게 점점 밥상이 풀밭으로 변해갔다. 남편이 밖에서 저녁을 먹고 들어오는 날을 골라 아이들에게 고기를 먹인다해도 고기나 생선을 먹는 양이 많이 줄은 것은 사실이다.

오늘도 늦는단다. 아이들에게 원하는 메뉴를 물어보고 우리끼리 외식을 하기로 했다. 이것 먹을까 저것 먹을까... 선택을 쉽게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이들이 흥분한다. 결국 사다리타기를 해서 돼지갈비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적당히 양념이 된 고기가 나오고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핏물이 서서히 고이면서 노릇노릇 고기가 익어가는 동안 눈빛이 달라지면서 침이 고인다.흡.. 아... 이게 몇 달 만이냐. 고기를 앞에 놓고 뱀파이어가 된 기분.

머리로는 충분히 동의한다. 그래 육식의 종말이 와야 세상도 평화로워질 것이다. 정치적인 이유를 떠나 개인의 취향이나 기호를 가지고 쉽게 사람을 판단하고 불편을 주는 사회분위기도 못마땅하다. 하지만 죽은 동물의 시체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면서 내 뱃 속은 푸근한 평화를 느끼는 걸 어찌하란 말인가. 거한 식사를 마치고 온 몸에 구운 고기 냄새를 휘감고 나오면서 아이가 말한다.
" 엄마, 나 이제 사람이 된 것 같아." 
" 그럼 니가 토낀줄 알았니? " 하하하...
하필 오늘이 보름이다. 보름달은 뭔가 동물적인 습성을 가진 종족에게 서사를 던지는 것 같다. 동굴 속에서 쑥과 마늘로만 버티지 못해 뛰쳐나갔던 호랑이가 저 보름달을 봤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




핑백

  • 달팽이네 집 : 남편이 채식을 포기한 이유. 2012-08-30 09:25:43 #

    ... 언젠가 여기 블로그에도 밝힌 바 있는데 남편이 채식을 했었다. 1년 6개월 정도.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고 심리적 정치적 이유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고 육식을 겁나게 좋아하던 평소 ... more

덧글

  • 푸른별출장자 2011/02/17 23:21 # 답글

    우~~~우~~~~

    인간은 잡식 동물이랍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는 달걀이나 우유도 먹지 않는 비건 동료가 있는데
    (중국이나 대만의 불교도나 도교 일파중에는 완전 채식주의자들이 있습니다.)

    지가 채식을 하건 말건 별 상관이 없었는데
    문제는 출장건...

    일본 한국 유럽 등으로 출장을 많이 다녀야 하고 또 목적지들이 대도시가 아닌 공업지대들인지라
    채식 식당이 거의 없다는 이유로 딴 사람들에게 출장 로드가 다 걸려 버려서 동료들이 죽을 맛입니다...

    신랑분이 그런 쪽 일을 하지 않으시기를...
  • 카피올라니 2011/02/18 08:32 #

    다행히도 신랑이 출장을 그리 자주 다니는 편은 아닙니다.어쨋거나 처자식 멕여살리느라 고군분투 하고 있습니다. 직장에서 주변 사람들도 불편할거라는 예상은 합니다. 메뉴도 순두부나 비빔밥으로 한정되어 버렸고요 그래도 한식은 좀 나은 편인데 일식집 가면 거의 굶는다는.....
  • 애쉬 2011/02/18 03:10 # 답글

    재미난 글 잘 읽었어요
    콩트 한 편 처럼 술술술 읽혔네요
    고기 먹기 힘들었다던 때가 언젠지 요즘엔 고기 피해 먹자면 집에서 손수 해야 ㅎㅎㅎ
  • 카피올라니 2011/02/18 08:39 #

    그러게요. 외식메뉴만 잘고르면 될 걸로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고기나 생선이 많이 쓰이더군요. 외식이 많이 줄었습니다. 고기도 덜 사는데 식비 나가는건 왜 안줄죠? 으...
  • 1212 2011/02/18 14:49 # 삭제 답글

    저도 사회생활하면서 비건인인지라 남편분의 노고가 맘에 와닿네요..ㅜㅜ
    집에서 잘 대해주셔요.
    채식하면서 사회생활하기 정말 힘들답니다.
  • 카피올라니 2011/02/18 16:40 #

    아는데요....채식주의자 가족노릇도 힘들어요. 내가 야만인 같다구요. ㅠㅠ
댓글 입력 영역